노을 자리

그림자의 무게

들마을 2010. 10. 6. 09:30

긴 장마와 더위 속에서도

푸지게 흐드러진 여름 끝에 남은 그림자

어렵풋한 기억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들숨은 부드럽고 날숨은 달콤하며

급해지는 심장 박동보다

더 날래게 발끝은 달려가고 싶어한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살이

코끝에 내려앉은 포실한 오후

직각과 수평의 날카로운 예각이

다부지게 뒤섞인 늦여름의 축축한 무대 위로

언젠가부터 팔짱을 끼고 응시하던 사내와

모든 것을 이미 던져버린 듯한 여자가

별 다른 흥미도 없다는 듯

지루하고 시답잖은 빈말을 내뱉으며 평행선을 달린다.

 

지나치게 찬연하게 비추던 빛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 진한 어둠이다.

후끈한 열정마저 총총히 사라지고

꽁꽁 닫힌 마음들이

굳은 손에 이끌려 휘청휘청 끌려나오는데

알 길 없는 소란 속에

정작 간절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저기 먼 곳을 향해 걷는 낯선 표정들

처음의 설레임마저 여린 숨으로 뱉어내고

억척스레 밟고 섰던 가느다란 두 다리도

제 힘을 못이기고 주저 앉아버리고

찢겨나간 기억들 사이로 고개를 저으며

둘 곳 없는 황망함을 빈하늘에 기대본다.

 

미처 갈무리 못했던

여물지도 못한 가냘픈 희망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 곳으로

머물 곳을 찾아 기욱거리다

한줌으로 뒤엉킨 마른 기억 끝에

다소곳이 매달린 잔망스런 눈망울들

 

훌훌 벗어던지지 못해 궁핍해진

비좁고 성가신 사각의 조명 속에

허락하지 못했던 호젓한 초대를 받는다.

이제 곧 제 자리로 돌아갈거라 믿는

안도의 한숨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