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지 못한 표상
바람이 불고 메마른 잎사귀들이 날리면
버려두었던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고
계절병을 다시 앓기 시작한다.
지난 시간들이 남겨둔 잔재 속에 담긴 사연도
제각각 새로운 기억들로 받아들이고 내뱉으며
자신들의 시간들을 찾아 존재를 알린다.
이미 색이 누렇게 바랜 기억들도 뒤질세라
무뎌진 광채를 내뿜으며 한 몫 거든다.
지난 시간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기억의 힘이다.
뒤돌아 보지 않으면 망각을 향해 떠난 기억들은
시간의 흔적들을 감싼채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중이다.
하지만 잊혀진 기억들도
제 몸을 불사르며 뜨거웠던 시간만큼은
여전히 놓을 수 없는 탓인지
불현듯 마음에 이는 번개같은 파문에도
시간의 기억을 찾아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어떤 기억은 잊으려 몸서리치며 버려도
여전히 가슴에 남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버리고 올 때와 두 번 째는
이미 마음에 이는 느낌이 다른데도 말이다.
꼿꼿한 자세를 지키며 흐트려지지 않던 마음도
결국은 한 쪽부터 무너져 내리며 절망한다.
시간도 기억도 마음도 결국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스스로 말끔하게 정돈된 기억들도
결국 오래된 시간의 이끼에 덮여 사라져간다.
한 낮의 가을 풍경을 맞으며 새삼 시간을 느낀다.
이 계절이 지나면 모든게 문을 닫는 시간이다.
한 해가 지고 한 시간이 닫히고
마음 속에 새로운 기억들을 정리하며
다른 시간들을 위해 또 다른 방을 준비한다.
지난 어두운 기억들이 무겁게 내려 앉아도
여전히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고
커다란 불빛같은 미소가 가슴을 적시며
마음도 기억도 다가오는 시간들 사이로 쏟아지며
새로운 어우러짐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돌고 또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