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향기

나팔꽃 시 모음

들마을 2018. 6. 7. 12:08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킨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나팔꽃 

             /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행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나팔꽃

                   /정호승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나팔꽃 
                   /이정자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 허무한 사랑인 것은
한 번도 가닿지 못한 언제나
마음뿐인 혼자 사랑이기 때문이다
저 홀로 생각하며 꽃을 피우다,
아니다 싶으면 이내 접어버리는
그러다가도 떨치지 못한 미련이
집착으로 남아 외줄타기를 하는 까닭이다
마음의 바지랑대를 칭칭 감고 올라가보지만
길 없는 허공이기 때문이다




나팔꽃의 기도 

                        /박인걸

줄사다리에 몸을 싣고
당신이 그리워
오르고 또 오릅니다.

밤길이 어두워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보랏빛 등을
길목마다 밝혔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마음도 크게 흔들려
여기서 그만 멈출까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만
그리 못할지라도
내년에 다시 오르기 위해
작은 씨앗을 묻어 두었습니다.



나팔소리          

                  /정연복

 
새날 새 아침이 밝아와요
이제 잠에서 깨어나요

생명은 보석보다 귀해요
목숨의 시간을 살뜰히 아껴요

그늘진 슬픔 따윈 잊어요
희망에 환히 깨어 있어야 해요

늘 명랑한 웃음 잃지 말아요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면
세상은 아름답게 보여요.

신선한 이슬에
흠뻑 젖은

연보랏빛 나팔꽃이
온몸 곧추세우고

새벽 미명
아직은 흐릿한 어둠 속

힘차게 부는
나팔소리.



나팔꽃

           /오세영


땅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피는 꽃도 있다.

어깨와 어깨를 메고

팔과 팔을 엮어

와와! 바리케이트를 넘는

그 향일성(向日性),

넝쿨들의 부단한 항쟁,

너에게

억압이란 있을 수 없다.

항상 푸른 하늘을 향해 자라는 너는

오히려

장벽을 꽃밭으로 일구는구나.

초연(硝煙) 가신 광장의 깃발들처럼

울타리 가득 뻗어 올라 빛을 향해서

만세!

총궐기한

빛 고운 우리 나라 6월 나팔꽃.




나팔꽃

                     /김건일

      

뼈가 없는 나

큰 뼈의 해바라기를 감고 타고 올라

해바라기와 같이 세상을 본다


질긴 힘줄로 친친 감고 올라

해바라기보다는 못하게 보이지만

해바라기가 보는 세상은 다 본다


큰 얼굴로 환히 웃는 해바라기

작은 얼굴로 그 턱밑에 딱 붙어서

웃는 눈길보다 더 찬찬히 세상을 본다





나팔꽃

                     /강 세 화


세상에 제일 먼저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침에 햇살과 나란히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나팔꽃  

                   /박덕중



굳은 땅, 가녀린 목숨 박고

찌든 공간

권태로운 마당

한줌씩 웃음 피어 울린다.


가녀린 목숨의 마디마디

피어내는 웃음꽃

삶의 頂点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가고


네 웃음 송이

어두운 마음 자락 밝혀 주면

네 목숨의 줄기 만큼

뻗어 가는 내 마음.


나팔꽃

네 화사한 웃음

천리만리 뻗어 가라

뚜뚜뚜 나팔 불어라.



나팔꽃

                      /김명배


아침마다 눈물로 꽃을 빚어도

네 가슴속의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다면,

한세상 오래 사느니보다

또 한세상 더 사는 게 낫지 않니.

태초의 하늘 그 푸른

약속만 다시 지켜진다면.




나팔꽃


                       /김명배


먼 산을 바라보면, 왜

눈물이 고일까.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면, 왜

서러울까.

가고 오는 것이

무엇이길래.

오요요 나팔꽃, 왜

먼 산을

바라보는가.

오요요 나팔꽃, 왜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는가.




나팔꽃 

                          /문효치

  

담벼락을 부여잡고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한사코 달아나는 하늘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나팔 소리에 귀 시끄러운 세상

이제도 더 불러야 할 노래가 있느냐.




나팔꽃  

                        /백우선

 

나팔을 불어 버릴까

아침부터 용용 나팔을 불어 버릴까

간밤 이 방의 꽃불 회오리

열대야로 달구던 뒤엉킴의 꽃잠을

동네방네 죄다 까발려 버릴까


짙붉은 이 방의 불봄 속내

깊고 큰 입으로 내벌려 보지만

밤내 염천봄 홀로 앓다가

말의 길, 말의 문 왼통 막혀

그놈의 꽃입만 벙긋벙긋



나팔꽃

                        /명서영


어느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왔을까?

아파트 잔디에 싹을 낸 나팔 꽃

나무 감아 밟고 벽 꼭 붙잡고 서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제비꽃 쳐다보며 예쁘다 하니

나팔꽃 보라색 띄었을까?

분홍 장미 어루만지는 사람들 바라보고

분홍빛 띄었을까?

분홍도 보라도 아닌 푸르스름한 나팔꽃


분홍에서 보라로 보라에서 분홍으로 가는 길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피어 있다

그 아이들 중 교통사고로 부모 잃고

고아원에 있다 큰집으로 온 인혜,

하얀 덧니 쌩긋 보인다


말수는 적지만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처럼 인혜는

아이들 속 소담소담 피어있다

땡볕 더욱 진한 색의 나팔꽃

하늘 향해 두 손 번쩍 들고 까르르 웃다

도담도담 한 뼘 더 자란다



나팔꽃

                           /목필균


어둠에 지쳐

새벽 창문을 열면

나를 불러 세우는

붉은 나팔 소리


나이만큼 기운 담장을 타고

음표로 그려진

푸른 잎새의 노래


밤새

쏟아지던 비에

말끔하게 닦여진

환한 미소 따라

달려가는 귀바퀴